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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통신대학교]한국사의이해 1학기 기말평가 출석수업과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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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우리 역사에서 내가 존경하는 인물을 들고, 나에게 끼친 영향을 서술해주세요.

존경까지는 아니고 매국노이기는 하나 의외의 인물인 이완용을 애기하고 싶다.

 

처세술이란, 세상을 살아갈 때 상대관계에서 능동적이고 다양한 활동과 판단결정을 하게 되는 사고력 행위를 말한다.

 

직장인에게 처세술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직장에서 인정받고 오래 있기 위해 갖춰야 하는 기술이다.

 

처세술이 없이는 직장 생활에 매우 어렵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결정권자와 지지자의 도움 없이는 혼자 힘으로 성과를 내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처세술을 인간이 품고 있는 감정 가운데 가장 강렬한 본성은 타인에게 인정받기를 갈망하는 마음이다라는 주장을 했었다.

 

그런 처세술을 가장 잘 가졌던 인물은 누구인가를 생각했고, 나는 비록 매국노이긴 하지만 변화무쌍한 처세술로 온갖 고위관직을 누비며 부귀영화를 누린 인물인 이완용을 떠올렸다.

 

이완용은 1858717(음력 67) ~ 1926212)은 대한제국의 관료이다. 을사늑약, 기유각서, 정미7조약,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하여 을사오적을 포함한 주요 친일파로 평가된다.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경덕(敬德), 호는 일당(一堂)이다.

 

1882(고종 19) 증광별시에 문과로 급제하였고 내각총리대신에 올랐으며, 을사조약, 기유각서, 정미7조약,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을 폐망시켰다.

 

정미 7조약에 서명해 행정권을 일제에 이전하였고, 1909년에는 독단으로 기유각서를 교환하여 일제에 사법권을 넘기고 결국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을 체결하기까지 이르렀다.

 

창씨명은 리노이에 칸요(李家 完用)이며, 일본제국에서의 작위는 후작이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조선사 편수회 고문 등을 지냈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는 소위 '일선(日鮮)의 융화'를 내세운 일제의 각종 내선일체(内鮮一體) 관련 정책에 찬동하여 전 한국 황족과 일본 황족 간의 혼인을 강제하였다.

 

그의 처세술은 생기는 이득은 취하고 보자는 식의 다분히 현실주의적인 처세술이였고 찬스가 왔을 때 잡아 채는 능력이였습니다.

 

이는 현대세상에 즉 직장에서 가장 필요하다고 보인다.

 

나는 이러한 처세술을 가지고 사내정치를 펼쳤고 그 사내정치는 실제로 도급직으로 입사를 해서서 정규직까지 아무런 시험도 없이 직급 전환을 이루었습니다.

 

이정도면 제가 처세술로 어떻히 세상을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제가 버릴수 있으면 악마가 되더라도 최대한 버리고 위로 올라 갈 수 있는 방법만 찾았습니다.

 

실제로 잘 배운 처세술이 있으면 직장내 사내정치라는 매우 중요한 것에 대해 잘 대처할 수 있다.

 

사내정치란,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과 상관없이 조직 안에서 개인의 이익과 아젠다를 추구하기 위해 권력과 이권획득을 목표로 삼는 것이다.

 

이 사내정치를 잘못하면 직장내 근무가 엄청 힘든 경우도 있으니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아무리 매국노라고 해도 현대 세상을 살면서 사용할 수 있는 점은 배울 수 있는 점이 있는 것은 배워야되는 것을 명심해야겠다.

 

나쁘다 생각만 하지말고 그의 처세술에 대해서 잘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일화로 이완용은 죽으면서 자녀에게 이러한 말을 했다고 합니다.

 

" 앞으로 미국이 강대국이 될 거니, 너희들은 친미파가 되어라

 

이것을 보았을 때 이완용은 매우 현실적으로 잘 생각했던 인물이 아니였나 생각이 듭니다.

 

2-나의 관점에서 우리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사건을 꼽고 그 이유를 설명해주세요.

박정희 정부의 긍정적인 사건을 한번 들춰봤으면 좋겠다.

 

박정희 정부는 군사정변으로 최고 권력을 차지한 박정희가 19631015일에 치뤄진 제5대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된 이후 제6·7·8·9대 대통령 선거에서 연이어 당선되어 운영되었던 정부이다.

 

박정희 정부는 4.19 혁명 정신의 계승을 표방하였기에 집권 초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으며, 이에 따라 적극적으로 관련하여 유적지 복원 및 문화재 정책이 수립되었다.

 

이 시기 광화문, 불국사, 석굴암, 수원화성 등 여러 유적지가 복원 및 재정비 되었고, 특히 경주의 안압지, 천마총, 황남대총 등 유적지를 집중적으로 발굴·정화하였다.

 

이외에도 1962년 대한민국의 문화재보호에 관한 법률인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었으며, 최초로 무형문화재가 지정되었고, 1970년대 들어선 자주국방이 국책으로 떠오르자 호국선열, 국방과 관련된 문화재 보수 및 정화가 이루어졌고, 1975년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설립되었다.

 

개인적으로 문화재나 박물관 이런데를 가는 것을 좋아하는 입장으로써 박정희 정부때 저런게 없었으면 지금쯤 어떨까라는 생각도 든다.

 

문화재나 유적이 실제로 의정부시는 고인돌을 파괴하고 실내테니스장을 만들었고 요즘 뉴스에 나왔던 강원 홍천군의 고인돌 사태를 보면 씁슬 하다.

 

문화의 결과물인 문화재는 정서와 가치관이 깃들어 있어, 민족이나 국가의 정체성을 정립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이다.

 

나아가 후세에 물려주어야 하기에 더욱 더 소중한 것이다.

 

그런 것이 보호 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박정희 정부때 문화재 보호법을 만들어 보호가 되고 있던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터닝 포인트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요즘 장능산 아파트 불법을 보면 매우 씁쓸하다.

 

김포 살던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초등학교 다닐 때 매번 장능산에 소풍을 갔던 추억이 있다.

 

나도 그런 추억이 가득했다. 다른 사람은 잘 몰라도 김포 사람이라면 저 아파트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유네스코까지 올라간 장능산의 전경을 가리고 사람의 욕심으로 저렇게 한다는게 매우 안좋다.

 

아무리 문화재 법이 있으면 모하는가라는 생각이 들정도이다.

 

진짜 예전같으면 저건 밀어버려도 될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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